누구를,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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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무엇을 믿는가?
믿음의 대상이 흐려진 시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쓰인다. 성도들끼리의 대화 속에도, 목회자의 설교 속에도, 찬송가 가사 속에도 ‘믿음’은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누구를 믿는가”라는 질문은 거의 하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입에 오르내릴수록, 오히려 그 대상이 희미해지는 이유다.
주일 예배에서 “예수를 믿으십시오”라는 설교를 들을 때, 많은 사람은 곧바로 머릿속에 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일 수 있고, 서양 화가들이 그린 온화한 얼굴의 예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믿음의 본질에서 한 걸음 비껴서게 되는 거다. 성경이 강조하는 믿음은 예수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는 종종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라”는 표현을 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서 ‘인격적 만남’이 곧 ‘인간 예수를 대상으로 한 감정적 친밀감’으로 오해될 때, 믿음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른다. 인간적인 호감, 존경, 감정적 유대는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예수의 ‘인물적 매력’이나 ‘이적 행위’에만 마음을 두고, 그가 무엇을 전하러 왔는지를 깊이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를 시험할 때조차, 그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만 의지하셨다.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순종이었다.
믿음이란 감정의 대상이 아니라, 약속의 대상이다.
그 약속이 곧 구원의 길이며, 그 길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믿고 있는가?”
이 질문이 분명해지지 않으면, 신앙 생활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게 된다.
그래서 이 장은 믿음의 대상을 명확히 하여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쓰였다.
1. 형상 속에 갇힌 예수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떠올리는 ‘예수’는 종종 성경 속 인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빚어진 환상 속의 형상이다. 서양 화가들이 그린, 훤하게 잘 생긴 백인 남성의 초상화, 파란 눈과 긴 금발 머리의 예수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마다 떠올리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가 왜 가톨릭 예배당의 벽마다에 걸려 있는가? 오래된 유럽 성당의 벽과 천정을 가득 메운 소위 ‘성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뿌리는 인간의 본능 깊숙이 자리한 우상숭배 사상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더 쉽게 신뢰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형상 속에서 안도감을 찾는다. 시내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우리를 인도한 하나님”이라 부른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러나 눈앞의 형상은 즉각적 위안을 주지만, 그 순간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으로 바뀐다.
2. Believe in(on)의 의미
한글 성경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번역된 영어 성경의 원문은 대부분 Believe in Jesus다.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면 Believe Jesus라고 쓸 수 있는데, 왜 굳이 전치사 in(on)을 붙였을까?
영어에서 Believe in(on)은 단순한 사실 인정이 아니라, 그 대상 안에 자신을 의탁하고,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신뢰를 의미한다. 미국 화폐에 새겨진 “In God we trust”도 마찬가지다. 이는 단순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입술의 진술이 아니라,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다. 믿음은 관계이며, 그 관계의 본질은 대상과의 전적인 신뢰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다’로 단순 번역된 Believe in(on) Jesus의 성경적 진솔한 의미는 예수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임이다.
3. 믿음의 대상: 하나님의 약속
성경이 증언하는 신앙의 궁극적 대상은 ‘인간 예수’가 아니라,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했다. 신약 성경은 이를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 부른다.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 곧 Good News다. 그러나 이를 한자로 ‘복음(福音)’이라 번역하면서, ‘복’이라는 글자에 이끌려 물질적 축복이나 형통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이것은 사탄이 의도한 본질의 왜곡이라고 본다. 복음으로 번역된 ‘좋은 소식’은 물질적·세상적 복이 아니라,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가는 구원의 약속, 곧 내세의 복인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원래 인생의 종착지는 지옥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옥이 아닌 천국행”을 약속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식이며 큰 기쁨이다.
4. 약속과 조건
그 약속을 우리에게 가져오신 분이 예수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이미 인간에게 한 번 속으신 경험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거짓말을 믿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구원이 아니라, 그 약속에 조건을 두셨다. 그 조건을 설명하고 실천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그 조건의 구체적 지침이다. 그래서 나는 인본주의에 찌든 설교만 듣지 말고, 복음서를 직접 읽으라고 거듭 강조한다.
5. 성경 속 믿음의 증인들
아브라함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믿고, 목적지도 모른 채 떠났다(창 12:1-4).
모세 –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믿고, 애굽으로 돌아갔다(출 3:12).
다윗 – 무기를 의지하지 않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약속을 붙들었다(삼상 17:47).
바울 – 율법학자의 명예를 버리고,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한다”는 약속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 자신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그에 따라 살았다는 것이다.
6. 예수의 사명
예수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하고, 그 약속이 요구하는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그는 철저히 인간으로 오셨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요 12:44)이라는 말씀은 믿음의 대상이 예수라는 인물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약속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결과, 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동일한 길을 보여주셨다.
7. 믿음이 우리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우리 신앙의 대상이 ‘인간 예수’에서, 그가 가져온 하나님의 약속으로 바뀌면 우리의 삶이 변한다. 삶이 변하면 세상이 기독교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우리의 삶이 변하여 악이 발붙일 곳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하나님이 승리하신다. 사탄은 예수의 발등상이 되고, 마침내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 그날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승리한 자들이 사는 날이며,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나라가 임하는 날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통로가 바로 우리 믿는 자들이어야 한다. 믿음의 대상을 바로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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