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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단어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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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천
댓글 0건 조회 46회 작성일 25-08-0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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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동의어는 용서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들, 특히 믿음이 자라가는 과정에 있는 분들에게서 자주 듣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다. 바로원수를 사랑할 있습니까?”라는 물음이다. 대답은 대체로 비슷하다. “예수님이니까 가능했지, 나는 절대 못합니다.” 실제 많은 신자들이 문제 앞에서 고개를 떨군다. 심지어 신실한 사람들 중에서도,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과 좌절 속에 사는 이들이 있다.

현상은 단순히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단어의 한국어적 의미의 한계, 성경 원어에 대한 무지, 그리고 때로는 교회의 의도적 오도가 겹쳐서 생기는 문제다. 교회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듣게 되는 단어가 바로사랑이다. 수많은 설교와 찬송, 교제 속에 단어가 반복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경 전체를 마디로 요약한다면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의미와, 성경이 말하는 의미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어에서사랑 대부분 감정적·관계적 친밀감에 비중을 둔다. ‘사랑한다하면 마음이 끌리고, 애정을 느끼고, 함께 있고 싶은 감정이 떠오른다. 그런데 바로 점이 함정인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들을 , 우리는 원수를 좋아해야 하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마치 감정적으로 원수를 껴안아 주고, 사람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야만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물론 성경에는 친밀감과 애정을 강조하는 사랑의 표현도 등장한다. 예컨대 헬라어 **φιλέω(phileō)** 친구나 가족 간의 애정, 친밀감을 나타내는 단어다. 그러나 예수께서원수를 사랑하라”( 5:44) 하실 사용하신 동사는 ἀγαπάω(agapaō) 쓰였다.

1. ἀγαπάω — 감정이 아닌 의지

ἀγαπάω, 당시 코이네 그리스어 발음으로는아가파오이다. 오늘날 한글이나 영어 성경에서는 그냥사랑’(Love)으로 번역하지만, 단어는 친밀감을 갖고좋아한다 의미가 아니라,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선행·헌신이 전제된 단어다.

사랑은 상대가 자격이 있든 없든, 나에게 호감을 주든 말든, 의지로 베푸는 선한 행동이 핵심이다. 나의 감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설교할 아가파오라는 사랑을 의역해불쌍히 여김’, ‘측은히 여김으로 풀어 설명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긍휼에서 시작된 구원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3:16) 여기서도 같은 ἀγαπάω 쓰였다. 우리가 기억해야 것은, 성경이 말하는세상’(κόσμος, kosmos)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이나 착한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장과 로마서 5장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자들이었다( 5: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사랑하셨다 것은 우리가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불쌍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와 무지, 멸망의 길을 보고 측은히 여겼으므로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의미이고 우리도 요구 받은 성품이다. 

3. 사랑은 용서

따라서 성경적 사랑에는 용서가 전제되는 것이다. 용서는 내가 마음이 넓어서, 또는 내가 훌륭해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구원의 조건인 거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이렇게 가르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자를 사하여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6:12)

기도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신다. 그러나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논리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설명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 2:13)

4. 긍휼은 사랑의 뿌리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고, 용서하기 위해서는 긍휼이 필요합니다. 헬라어 οἰκτίρμων(익티르몬)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 뜻하며,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창자가 끊어질 불쌍히 여기다라는 강한 감정을 담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군중을 보시고, 병든 자를 보시고, 목자 없는 같은 무리를 보시고 σπλαγχνίζομαι 하셨다고 기록한다( 9:36, 1:41, 7:13). 이것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다. 행동으로 옮겨지는 긍휼의 마음이다. 예수님의 긍휼은 병든 자를 고치게 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게 하고, 죄인을 용서하셨다.

5.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의 깊이

그러므로원수를 사랑하라 명령은 단순히 감정을 조절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의 죄와 무지, 상처와 멸망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시선을 가지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사랑은 좋아한다는 감정이나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고차원 명령인 거다.

나에게 지은 , 나를 눈물 나게 원수를 용서하고 측은히 여길 이유는 하나다. 나도 똑같이 하나님의 원수였고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용서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진 필수 조건인 것이다.

6. 원수를 사랑할 있다

현대 교회와 신자들이사랑 감정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결코 원수를 사랑할 없다. 그러나사랑 긍휼에서 시작된 의지적 행위로 이해하면,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마음에좋아한다는감정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흘려보낼 수는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결정이다.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것을 닮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인 거다. 우리가 언어의 깊이를 회복할 , 예수님의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 명령은 이상 부담스러운 요구가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당연한 삶이 되는 것이다.

이순천장로

M.Div /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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